일단 들어가 사는 사람이 임자? 남아프리카공화국

글, 어예진

📌 필진 소개: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경제TV에서 기자와 앵커로 일했고요. 지금은 국내 경제,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뉴스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탐구하는 연구자이자 방송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청년 주거 정책을 돌아보는 ‘청년 주거 세계여행’. 오늘은 저 멀리 아프리카 대륙 중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인종 차별이 법이었던 곳,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택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남아공은 17세기부터 네덜란드와 영국 식민지를 거치며 유럽 백인들의 이주가 많이 일어났는데요, 이 과정에서 원주민인 흑인들의 땅을 빼앗고 노예로 부리는 등 인종 차별이 벌어졌어요.


1940년대 후반에는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자, 아예 인종차별을 법으로 만들어서 유색인종들을 억압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백인을 우대하던 당시 정책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고 해요. 


아파르트헤이트는 백인과 흑인의 거주 지역도 철저히 구역을 나눴습니다. 흑인은 번화한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고 척박한 지역에 모여 살도록 했죠. 이곳을 타운십(Townships), 혹은 슬럼가라고 불러요.


흑인들은 지정된 곳 외에는 접근이 금지되었는데요. 다니는 길, 화장실까지도 백인과 흑인을 철저히 분리했습니다. 당시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공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아래 사진처럼 오른쪽 흑인들이 사는 판자촌과 왼쪽의 고급 주택들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흑인들은 타운십에 주로 살고 노른자 땅은 백인들이 소유하고 있죠.

1990년대 들어 흑인 해방 운동이 시작되고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면서 흑인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집니다. 그해, 남아공 사상 첫 다인종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뽑힌 사람이 바로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입니다. 


흑인이 대통령이 되자 보복을 두려워한 백인 부유층들은 대부분 해외로 이민을 가고 기업들도 떠나게 됩니다. 이동의 자유를 되찾은 흑인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요하네스버그로 몰려들었어요. 만델라 정부도 흑인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요하네스버그와 케이프타운 등 취업 가능성이 높은 주요 도시의 도심으로의 이주를 장려했습니다. 이때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급증하면서 실업자가 넘쳐나고 주택난이 발생하게 되었죠.


쓰레기 더미에 갇혀 사는 사람들


백인과 기업들이 일시에 떠나자 남아공의 경제는 크게 휘청였어요. 부동산 가치가 하락해 세금이 건물값을 넘어서는 사태가 발행했습니다. 결국 방치되는 건물이 많아졌죠. 도시 입장에서도 세수가 부족하니 수도, 전기, 쓰레기 수거 같은 주요 인프라를 제공하지 못했고요.


이때 범죄 조직들이 일부 버려진 고층 건물부터 폐공장에 이르는 곳을 불법 점거하고 나섰어요. 그리고는 판자나 커튼으로 방을 나누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 임대료와 보호비를 내고 거주하게 했습니다. 무허가 쪽방을 만들어 불법 임대를 한 거죠. 이런 구조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출처: BBC 홈페이지


작년 8월 요하네스버그의 버려진 오피스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해 어린이를 포함해 70여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곳 역시 폭력조직이 불법 점거해 탄자니아, 말라위 등에서 온 이민자들을 받아 살도록 한 곳이었죠. 전기 대신 사용했던 양초가 화재의 원인으로 알려졌어요.


이런 불법 거주지는 공무원, 경찰 등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가득 쌓거나 쇠사슬로 입구를 막고 조직적으로 문 앞을 지키는 곳이 많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온 가난한 이민자를 비롯해 사정이 어려운 청년들은 이런 불법 거주지의 화장실, 영안실 등을 집으로 꾸며 살고 있습니다. 


불법 침입자를 함부로 내쫓지 못하는 법


이처럼 사람들이 불법으로 점거해 거주하는 대형 건물과 개인 주택이 요하네스버그 주변에만 대략 600채가 넘는데요. 시내를 벗어나면 그 숫자가 더 늘어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다음엔 이런 생각이 드실 수 있어요. ‘집주인이 왜 불법 거주자들을 쫓아내지 않지? 정부가 폭력조직을 몰아내고 공공주택으로 리모델링 하면 되지 않나? 사람들이 전기와 수도를 제대로 공급받으며 살 수 있게 해주면 참 좋을 텐데…’ 하고 말이죠. 그러나 그게 법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PIE라는 아주 기가 막힌 법 때문인데요. 우리 말로 하면 ‘불법퇴거 방지법’입니다. 1998년에 만들어진 법인데, 불법 점유자일지라도 법원의 명령 없이는 집에서 퇴거 시키거나 집을 철거할 수 없다는 내용이에요.


내쫓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집 주인이 불법 점유자가 거주할 대체 숙소 또는 토지를 마련해 줘야 해요. 예를 들어 폐공장에 무단으로 200명이 들어가 살고 있다면, 200명이 살 곳을 마련해 줘야 모두 내보내고 건물을 팔거나 리모델링을 할 수 있는 거죠.


남아공은 왜 소유자가 아닌 점유자의 권리를 이토록 옹호하게 됐을까요? 처음의 명분은 노동자들의 근로 의지를 위한다는 거였어요. 거주지 또는 토지에 대한 안정성이 없으면 열심히 일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논리였죠. 문제는 이 법 때문에 도시 개발도 안 되고 주택난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는 거예요.

 

지어도 지어도 부족한 주택


1994년 이후 남아공 정부는 ‘Breaking New Ground’라고 불리는 주택 재건 및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2014년까지 불법 주택을 근절하는 것을 목표로 세운 바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현재까지 약 500만 개의 주택을 공급했습니다. 무료 또는 아주 낮은 가격에 말이죠. 


대표적인 예가 오피스 빌딩을 개조해 저렴하게 세를 놓는 것이에요. 오랫동안 비어있는 오피스 건물을 리노베이션해서 방 한 개 혹은 두 개짜리 아파트로 바꾸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멀끔한 아파트는 월세가 약 3천 랜드, 우리 돈으로 대략 22만 원 정도 합니다. 보증금은 보통 두 달 치를 내는데, 입주 후 첫 달은 공짜인 곳도 있어요. 젊은이들은 기존에 살던 도시 외곽에서 통근하면 교통비가 꽤 많이 들기 때문에 도심에 거주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은 2023년을 기준으로 여전히 240만 가구 이상이 주택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 가운데 140만 가구는 판잣집 같은 불법 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어요. 이마저도 실제보다 적게 집계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이렇게 주택이 부족한 이유 중 하나는 인구의 도시 집중화 때문입니다. 현재 남아공 인구의 62%가 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도시에 와야 하기 때문이죠. (참고로 남아공의 공식 실업률은 32%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24세 미만 청년 실업률은 60%가 넘습니다.) 


양극화의 끝판왕, 남아공


지금까지 한 얘기만 보면 ‘남아공은 정말 못 사는 사람 천국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이는 절반의 진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요. 남아공 인구 가운데 80%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빈곤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백인 소득의 6분의 1밖에 벌지 못 하니까요. 그렇다면 나머지 20%의 백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GDP 기준 1위(2024년 전망치)에 해당하는 가장 잘사는 나라입니다. 이건 잘사는 사람은 매우 잘 살고 있다는 얘긴데요. 남아공은 인구의 10%가 국가 전체 자산의 71%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늘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로 꼽혀요.


남아공의 주택 형태는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서 다룬 무허가 주택이 있고, 전통 가옥도 여전히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택 형태 중 하나 입니다. 오두막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주로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흙과 풀, 나무, 돌 등 천연 재료를 이용해 짓고 거주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통 가옥. 출처: isbyearsixsouthafrica.weebly.com


도심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단독주택(하우스)과 플랫이라고 하는 빌라 또는 아파트 형태에 주로 삽니다. 타운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데요. 중산층이 사는 주택가를 보면 2중 3중으로 된 철문과 전기 펜스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플랫 중에서도 입구에 따로 철문이 달리고 경비실이 있는 곳은 그렇지 않은 곳 보다 조금 더 가격이 비쌉니다. 치안이 불안정하고 강력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남아공에서 보안은 집을 고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좌) 남아공의 단독주택, 우) 컴플랙스.  출처: 구글맵


잘사는 동네 단독주택은 미국의 부자 동네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주택과 매우 비슷합니다. 남아공에서 가장 비싼 동네는 케이프타운인데요.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의 고급 주택들은 한 달 월세만 900만 원 안팎에 이르며 매매가는 수십 억을 호가합니다. 


컴플랙스라는 타운하우스 같은 주거 단지도 있는데요. 컴플랙스는 단지 앞을 지키는 경비도 있고 관리인도 따로 있어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합니다. 


저렴한 거주 비용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면 상대적으로 생활비가 적게 듭니다. 대부분의 국가보다 절반 이상 저렴한 편이라고 해도 될 정도죠. 물론 사는 곳과 가족 수, 생활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주택 임대료는 영국보다 약 65%, 미국보다 74%, 독일보다 55% 낮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1인 가구의 월 생활비(식비, 유틸리티, 교통비 등)는 약 630 달러 정도 듭니다. 여기에 별도로 방 한 개 짜리 아파트 월세가 평균 320~380달러 정도 하죠. 좀 더 비싼 케이프 타운에서는 방 한 개 짜리 아파트 월세는 420~630달러 정도 됩니다. 


흥미로운 점도 몇 가지 있는데요. ‘프리페이드(prepaid)’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전기, 물, 가스 등을 마트에서 구입해서 쓰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남아공은 수도나 전기 등을 국유기업에서 제공하는데, 부정부패로 찌든 남아공 공무원들이 폭탄 같은 요금을 청구하는 일이 왕왕 있어서 선불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요. 


마트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전력을 구매하면 영수증에 번호를 찍어주는데요. 집에 있는 계량기에 그 번호를 입력하면 전기가 충전이 되는 방식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남아공은 ‘북향’이 좋은 집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남향이 햇빛도 잘 들어오고 겨울에도 따뜻한 집이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남아공은 남반구에 있기 때문에 우리와 반대로 북향집을 골라야 햇볕이 아주 잘 들어온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남아공은 과거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계기로 흑인들이 외곽의 척박한 곳으로 쫓겨나 모여 살게 됩니다. 이곳을 타운십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흑인들의 주요 거주지 입니다.
  •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이후 도시로 몰려는 사람들로 인해 실업자와 주택난이 발생합니다. 이때 일부 폭력 조직들이 버려진 건물을 무단 점거해 무허가 쪽방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거주하게 합니다.
  • 남아공은 ‘불법퇴거 방지법’이 있어서 불법 점유자들을 함부로 쫓아낼 수 없습니다. 이 법 때문에 도시 개발이 안 되고 주택난도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 남아공 정부는 1994년 이후 현재까지 약 500만 개의 주택을 공급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기준으로 240만 가구 이상이 집이 없으며, 이 가운데 140만 가구는 불법 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남아공의 주택 형태는 전통 가옥과 판잣집 외에 단독주택과 플랫이라고 하는 빌라 혹은 작은 독채 아파트, 그리고 타운하우스 같은 컴플랙스로 크게 나뉩니다. 
  • 강력 범죄가 많기 때문에 남아공 주택에서 보안은 집을 고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 남아공의 임대료는 미국과 영국, 독일보다 50~70% 가량 저렴합니다.


💌 <청년 주거 세계여행>은 매주 수요일 머니레터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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